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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섬에서 보내는 새벽 네 시.

dancer on the keyboard 2017. 5. 19. 04:25

오지은의 익숙한 새벽 세 시는 이미 지났고, 봄에서 여름이 다가오고 있어 새벽도 새벽답지 않다. 작년 이맘 때 무얼 했나 생각했는데 그때도 이렇게 밤샘 근무를 많이 하고 있었고, 주말에도 나와서 동료들과 신세한탄을 했었다지. 


그러니 하루 기억나는데, 내가 참 애정하는 장소, 몽중헌. 

주말 근무였고, 다들 연애하랴 약속이랴 주변 친구들 중엔 연락 가능한 아니 당장 불러서 밥 먹을 친구가 없었다. 누구보다도 먹는 걸 좋아하는 하얗고 키 큰 그는 그럼 자기는 부채교와 하교를 먹으러 가야겠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참 아쉽더라. 무엇이 아쉬웠냐 하면 나는 당장 부를 친구 하나 없는데 그 하얗고 키 큰 어깨 넓은 그는(아 형용사가 너무 많다, 키 큰 J) 이제는 누군지 알 것 같은 그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었겠지. 그 당시만 하더라도 그 또한 친구들과의 시간이 가장 소중하고 주말이 가장 소중한 일개 직장인이었으니까. 


그게 참 마음에 남아, 나의 친한 하얀 친구에게 '몽중헌' 때문에 속상했다며 무지 말을 했었다. 그때도 오늘처럼 날이 좋았다. 주말은 아닌 오늘이지만 그랬다. 그래서 속상했다. 그의 친한 언제든 불러낼 수 있는 친구들이. 그런 따뜻한 사람들이 주변에 적어도 타지에 살고 있는 나보다 많다는 점이. 


새벽 두 시 반, 허벅지만큼 부풀어오른 내 종아리 혈액순환을 위해 여의도 역을 걸어다녔다. 문득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그 누구라도 여태 일하는 걸 좋아할까. 요즘에야 내가 참 좋아하는 분야 일을 해서 낮만 해도 신이 나 일했지만 이런 새벽 생활이 계속 되면 쉽진 않다. 

정말이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작년 초, 비슷한 생각을 했다. 첫눈이 내렸고 나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예쁜 첫 눈을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대화할 상대가 없었다.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상대와는 가장 멀어지기로 결심했던 사이였고, 내 마음이 그만을 찾았던 것 아녔다. 

지난 달 내 일기장 주제에는 지금 이 순간 누가 떠오르냐/누가 생각나냐/누구에게 전화걸고 싶냐고 했었는데, 거기에 작년엔 흑곰조차도 아니라고 했었다. 이걸 보면 정말 시간이 지나고 나도 생각치 못한 그런 연인들이 지나감에 따라 그를 잊어가고 있었던 듯. 똑같은 주제를 올해도 맞이했었다. 그 날은 무조건 꼭 일기를 쓰자고 맘을 먹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또 새벽 퇴근. 
정신적으로 힘든 요즘이었는데, 그래도 일기는 썼다지. 

그리고 누가 생각나냐 란 그 일기장의 질문에 나는 "지금은 잠만 자고 싶다" 라고 썼다. 그런 걸 보면 현재의 나는 Obsession에 빠져있는 게 맞을 지도. (집착보다 뭔가 더 잘 어울리는 영어단어군). 

오 월의 그 여름 바람, 오 월만의 그 공기, 일 년이 지나도 비슷한 거리, 비슷한 사람, 비슷한 내 생활.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그때의 우리가 떠올랐다. 여태 키 큰 J가 떠올랐었는데 처음으로 우리가 만났던 그 생각치 못한 순간들이 시작된 그 시점이 돌아오니 그때의 우리가 떠올랐다. 


그와 지냈던 시간은 지났지만 같은 계절이 오니, 그 같은 계절이 지나면 더 옅어지겠지. 하지만 좋은 점 하나는 이제 나는 동일한 계절을 보내는 동안 예전의 추억들과 함께 키 큰 그와의 추억도 쌓여 더 풍성하고 풍만한 계절들을 맞이할 수 있게 됐다. 긍정의 아이콘답구나. 


생각하면, 모든 연애에서 그랬다. 모든 연애 후엔 같은 계절만이 남았고, 그 계절을 오롯이 겪은 후에야 나는 참 많은 걸 떨쳐냈다고 생각했던 듯 하다. 


- 익숙한 여의도, 새벽 네 시. 알 사람은 아는 극한 직업의 주인공. 2017.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