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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not, 너라는 챕터도 없었다.

dancer on the keyboard 2016. 12. 5. 15:23

하얗고 키 큰 그 친구가 이전 사랑과 달랐던 이유는 내 욕심이었다. 옆에서 좋은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다는, 그리고 함께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 욕심, 오래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내 확신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던 내 욕심.  

나는 나였다. 누가 뭐라 해도 내 인생이 가장 소중한데, 그걸 항상 알고 있는 나였지만 잠시 흔들렸다. 내가 소중하니 내가 선택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이런 이유로 그처럼 나도 열심히 했다. 


인생의 한 챕터에 그가 남겨져 있는 그 흔적만으로도 나는 좋다. 

우리는 흔들리는 이 시기에 함께 할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처럼, if not을 생각해보자. 

어쩌면 같은 곳에서 함께 일하지 않았더라면, 

함께 주말마다 출근하지 않았더라면, 

넷이서 타코를 처음 먹지 않았더라면, 

둘이서 파스타를 두 번이나 먹지 않았더라면, 

그가 내 생일날 하시를 예약해주지 않았더라면, 

그가 우랑 앞에서 나와 마주하지 않았더라면,

함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카카오톡이라는 메신저를 주고 받지 않았더라면, 

둘 다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다이어트를 하지 않아서 술마시는 걸 관두지 않았더라면, 

집에서 내가 홈파티를 하지 않았더라면, 

친구들이 모두 집에 가기 원치 않았더라면, 


우리는 만날 수 없었다. 

알콜이 고팠던 그와 시간이 아쉬웠던 나였다. 

또렷하게 기억나는 그 순간들이 언제나 남아 있을 것이다. 


즐거움만 남는다. 

그렇게 내 인생의 아름다운 챕터로 그는 기억될 것이다. 

그래 이제는 기억하자. 추억하자. 


그는 귀를 막았다. 나는 입만 열었다. 나는 말하는 벙어리이다. 

그가 귀를 막았다고 믿고 싶지 않으나 사실이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그리고 그게 짧든 길든 평생이든. 

더 이상 어떠한 해석도 하지 말자. 


그를 사랑하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고 그와 함께 오래 가고 싶다는 내 욕심이 이렇게 11월 내 블로그를 가득 채우고 있지만, 나는 이제는 시간이 지나는 내 순간에 몸을 맡겨야 한다.  

나를 사랑하니까 그를 사랑하는 내 마음을 지키고 싶었고, 나는 무슨 일에서든 미련 없는 사람이고 싶었다. 이번은 미련이 남지만, 그 미련을 합쳐서 다음에 잘 하자. 많은 가르침을 준 사랑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 잘 하자. 나는 그가 진심으로 잘 풀렸으면 좋겠다. 내 마음 다해 응원하고 싶다. 

직장인의 신분과 사업가 신분 중 사업가 신분만 남았을 때의 그 불안감, 겪지 않아 모르지만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내가 못해준 그 배려를 누군가가 해줬으면 좋겠다. 


하얗고 키 큰 그 친구와의 따뜻했던 이 챕터는 이제 끝이다. 

인연이라면 어떻게서든 언제든 만나게 돼 있다. 우리가 같은 곳에서 일하고 같은 곳에서 함께 공유했던 많은 게 우연 아닌 인연이었듯 말이다. 지금은 서로 자신에게 집중하며 새로운 생활에 감사하고 경험할 때이다. 만날 사람은 만나고 이젠 지나야 할 수도 있다. 이쯤 끝내자. 

선영아 마침표다.  


+혹시나 하고 너를 보러 가 너 대신 감기를 얻어 왔지. 그동안 썼던 여러 개의 편지가 내 손에 쥐어져있었고, 그 중에 나는 네게 마지막 편지를 건넸다. 나오지 않을 걸 예상했고 그랬던 너를 보니 그냥 인사만 하잔 생각이 들었다. 우린 마지막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까. 얼굴을 봐야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작하고 싶어 널 찾아갔지만 내 마음대로 안 되는게 사람 마음인 것처럼 너에게도 자유가 필요하고 그래서 나는 인사만 하려 했다. 그래도 그 앞에서 한 시간 가량을 떨게 만들다니, 모진 사람. 하지만 너라고 밖에서 떨고 있을 나를 생각하면 네 마음이 편했겠나 싶다. 따뜻한 곳에 친구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지만 신경이 안 쓰이진 않았을 것이다. 

아직 춥지만 따뜻해질 것이다. 너의 사업도 너의 미래도 따뜻했으면 좋겠다. 내 품에서 따뜻해질 수 없다면 다른 품에서라도. 사업이라는 핑계 대신 사업까지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더 성장했으면 한다. 시작하자는 그 편지가 시작되지 않을 것이란 편지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그냥 냉혹하게 돌아서기엔 나는 그럴 인물이 되지 않는다. 난 그 편지가 아무런 영향도 안 미칠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나는 너를 참 잘 알기에. 어쩌면 알고 있다고 말하는 그 순간 나는 너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과연 너는 내가 널 찾아갈 줄 알았을까. 너는 나를 알까. 

너를 다시 만나면 크게 미소지어주겠다. 어색함 하나 없이.
보고 싶지만 보고 싶음이 줄어들 것이다.
더 큰 마음의 내가 되어야지, 더 크게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람이. 

너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지난 몇 주간 네 행동이 내 예측 밖에서 벌어진 행동이 없었기에, 무려 어제만 하더라도. 그래서 나는 신기한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너는 술에 취해도 내게 연락을 하지 않을 사람이다. 그런 독한 마음이 좋았었지. (뭐든지 양날의 칼인 것 같다, 좋았던 이유가 싫은 이유와 동일하니 말이다).
과연 다른 일이 생길까? 그때의 나는 그리고 너는 어떤 마음일까. 

과연 우리는 달라질까? 아무도 모를 인연, 될 건 언제든 되고 안 될건 언제든 안 된다.
더 나은 사람이 없어서 연락을 할 지라도, 더 생각나서 연락을 할 지라도, 그때의 우리가 놓여진 상황 속에서 모든게 결정될 것이겠지.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은 없고 이번 챕터는 끝이라는 마침표를 지었고 그 마침표 지은 잉크는 마르기 시작했다. (만나기 시작하며 쓰여진 '우리'라는 글자는 마르기 시작한다. 모든 연인들처럼) 

과연 우리는 연락을 할까? 뭐 인생은 한 번뿐이고 죄를 짓지 않는다면 다 가능한 게 인생 아니겠는가.
지나고 나면 다 우스운 이야기인 것을.
언젠가 너와 나는 웃으며 오돌뼈를 안주 삼아 압구정 포차에서 함께 소주 한잔 기울일지도 모른다. 

과연 우리는 변할까? 우리는 아마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냥 이대로일 것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 그저 포기할 부분은 포기하고 좋은 면만 보고 그 면이 포기할 부분보다 양적으로 크면 감당하는 것이지. 

서로 싫어하는 게 뭔지 얘기했을 때, 그는 거짓말 하는 걸 가장 싫다고 했다. 싫어하는 게 거짓말이라서 나는 거짓말하지 않았다. 거짓말 하지 않고 너를 향해 달려갔으나, 싫어할 뿐 좋아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넘칠 정도의 사랑에 감사하다.
다행이 만나면서도 난 외롭지 않았다. 너를 찾아갔던 어제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