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는 길, 가로등이 비추는 막다른 길의 코너를 돌면 네가 있을까 하는 기대를 한다.
없는 걸 알고 있다. 그래도 혹시나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한번 또 해본다.
집 주변에 네 차가 있지는 않을까,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본다.
없을 건 알고 있다. 그래서 소심하게 눈동자를 좌우로 흘기며 살펴볼 뿐이다.
집을 향하는 길목에, 차소리가 나면 라이트가 켜지면 혹시나 너일까 하고 걷던 걸음의 속도를 줄여본다.
아닐 걸 알고 있다. 그런 건 티비 속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나온다는 걸.
집 편지함이 나를 먼저 반긴다. 혹시나 네가 편지를 써두고 넣어두고 가진 않았을까 하며, 나쁜 시력으로 멀리서 큰 눈을 떠서 사서함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말도 안되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사서함을 뒤지지는 못한다.
집에 도착하면, 네가 집 앞 현관에 편지를 혹시나 두고 가진 않았을까, 엘리베이터가 내 층에 도착하면 웃기게도 심장이 조금 빨리 뛴다.
당연히 없을 줄 알고 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그런 로맨스의 기대를 해본다.
흔적이 어디 있진 않을까 하며, 혹시나 그의 향이 나진 않을까 킁킁 거려보기도 하지만 당연히 없다.
그런 건 다 티비 속 환상이었던가. 내가 꿈꿨던 건 환상인 걸까.
그가 집 앞에 나타나주길 바라던 건 사귈 때도 마찬가지였다. 서프라이즈를 싫어하지만 가끔은 내가 보고싶을 때, 상대가 날 보고 싶어할 때, 달려왔으면 했다. 욕심인 걸 알고 있다. 어쩌면 그가 지금 집 앞에 없는 건 내가 없는 삶이 만족스럽고 그 정도 애정이라는 말도 틀리진 않은 걸 수도.
내 인생에 더 집중하고 사는 좋은 계기가 된 건 맞다. 그를 만날 때 불과 며칠 전이면 그때도 그가 내 인생 안에 있고 함께 집중을 했었다. 이젠 갑자기 생긴 그 공백을 날 위해 채우겠지만 대체재는 절대 대체가 불가능하다는 정설이 있지 않은가.
그를 헤아리는 건, 이별의 슬픔 때문이 아니다. 이별통보의 미안함 때문도 아니다. 더없이 다툴 것을 알고 있고 그 과정들이 지난할 것도 알고 있다. 친구의 말을 따르면 해보지 않고 포기한 것 같은 아쉬움 때문이겠지. 아직 감정이 생생하게 숨쉬고 있는데, 죽어가는 감정이 아닌데 더 피터지게 다퉈보고 해야 하는데, 내 감정에 대해 상대의 감정에 대해 행한 유효판정이 너무 모자란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지 않은 건 아닌데, 더 해봐야 하는데, 더 우리라는 관계를 믿고 가봤어야 했는데 무서워서 피했다. 정을 주고 정이 끝나가는 과정이 얼마나 무서운 지 경험해보지 않았는가. 빠르게 결론에 도달했던 날 탓하진 않는다. 하나 탓하자면 하나 배웠다면 좀 더 그 과정에서 솔직하게 내 마음을 살펴달라고 얘기를 해보고 '함께' 해나갈 수 있는 용기였을 것이다. 끝나고서야 용기를 부린다. 그 용기가 상대에겐 또 상처겠지 싶어 미안하다. 인내하는 법은 단순히 화를 낼 때뿐 아니라 의견을 낼 때도 마찬가지며, 달달한 열매를 맛보기까지 즉 아름다운 화해를 하기까지 마음을 연마해야 한다.
지금도 혹시나 네가 밖에 내가 나타나길 바라며 잠시나마 들리진 않을까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