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사랑을 제외하고 절대적인 것은 없다.
그런 점에서 행복 또한 절대적일 수 없다. 기쁜 일이 기쁜 일임을 느끼는 이유는 슬픈 일이 있기 때문이며, 음식의 즐거움을 아는 것 또한 덜 맛있는 음식과 더 맛있는 음식이라는 비교상대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자, 이제 여기서 이 상대성을 이야기한 이유를 말할 차례다.
배 한 척이 바다에서 항해 중인데 우리 모두 위험 속에 들어가고 싶진 않을 것이니, 순항할만큼의 잔잔한 파동만을 바랄 것이다. 허나 이 파동이 처음부터 끝까지 간다면 그 중간중간에 거센 파도와 바람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항해가 얼마나 기쁘고 감사할 줄 모른다.
아마도 처음 지었던 그 설렘에 벅차던 미소와 기쁨도 당연한 것이 되고 비교할 순간이 없어 미소조차 무표정이 되어버릴 지도 모른다.
이처럼 어쩌면 현재의 나는 이러한 무표정한 삶을 원했던 것일 수도 있다. 어디 하나 문제 될 것 없는 현실과 나를 힘들고 지치게 하는 것이 없는 순간들을 기대했고 그 기대는 현실로 부응했다. 매너리즘에 빠져 그렇게 밖으로 나도는 것을 즐기던 내가 조용함 속에서 (조용함은 언제나 사랑했던 순간들이지만)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가만히' 있음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기다린 순간이 조금 오랜 현실로 이어져가며 나는 이 순간들이 기쁘면서 동시에 아무런 감동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래, 최종 목적지에 정박하기 전에 나의 항로와는 반대되는 항로로 이끄는 바람과 거센 파도들고 있어야 따사로운 햇살과 잔잔한 파도가 얼마나 고맙게 느껴지겠는가. 그리고 어저면 쉽지 않은 자연의 반대 속에서 나의 길을 찾으려고 힘차게 노력하는 것 또한 꽤나 기쁨을 선사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일테다.
상상해보라. 파도의 반대 방향으로 나가기 위해 노 저으며 앞으로 나가는데서 느끼는 그 쾌감은 가만히 있을 때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상대적인 비교대상이 없는 현재에 나는 감사함을 배은망덕함으로 갚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는 그 상대적인 기쁨을 더 느끼기 위해 나를 조금은 다른 환경으로 데려갈 수도 있다고 결론 내렸다.
기쁨도 상대적이고 슬픔도 상대적이라면,
간사하게도 슬픔은 종잇장처럼 매우 얇았으면 좋겠다.
혹은 더 큰 기쁨만 계속 와서 그 전의 기쁨이 슬픔처럼 느껴질 수 있도록 배가하는 기쁨만 내게 오든지.
-2015.11.19